정의로운 [義] 일을 맹렬히 [烈] 하자!

3.1 운동은 세계사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지만, 독립 쟁취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에 독립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만 갔고 독립운동 지도부는 보다 구체적인 행동 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방법과 전략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이 다음과 같이 구체화되었다. 첫째는 민족 역량을 강화하자는 실력 양성론으로,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독립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 우리의 실력이 일본과 대등하게 되어야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외교를 강화해야 한다는 외교주의론인데, 근대적 의미의 민족 독립과 민족 국가 수립은 먼저 국제적 후원과 지지를 얻어야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폭력 수단을 통하여 국내외에서 지속적인 무력 투쟁을 해야 한다는 무장 투쟁론으로, 특히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이런 신념을 확고히 하여 무장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 부대 구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 세 방향은 시기별로 비중을 달리하며 주변 상황에 맞게 실행되었다. 여기에 특별히 더 언급할 독립운동의 방향이 바로 작탄(폭탄) 투쟁(炸彈鬪爭)’, ‘암살 파괴 운동이다. 이것은 애국지사들이 비밀 조직을 결성하거나 개인적 의거에 나서 일제의 기관을 폭파하고 일본과 친일 요인들을 사살한 독립 투쟁이다. 이 투쟁을 1975년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에서 <독립운동사> 7권으로 <의열 투쟁사>를 펴내면서부터 의열 투쟁(義烈鬪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의열의 뜻

의열 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는 1919년 신흥 무관 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조선의열단’(이하 의열단)이다. ‘의열이라는 용어도 이들의 의열단 공약 10개조의 제1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의 와 맹렬의 을 가져와 의열로 조직의 이름을 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은 그 중요성에 비해 해방 이후 전개된 격렬한 이념 논쟁으로 인해 적절한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해 왔다. 최근에 와서야 조선의열단 100주년을 맞아 기념 사업회가 발족하는 등 그들의 피압박 민족의 자결권과 인권을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의로운 투쟁을 했던 것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잇따르고 있다.

그 밖의 의열 투쟁은 순전히 개인적인 결의와 준비로 이루어지기도 했고, 소집단 규모의 비밀 결사나 큰 조직체의 하위 별동 조직으로 독자적 판단과 선택에 의해 목표물과 행동을 결정하기도 했다. 소수 인원과 적은 비용으로 기동성과 집중도를 높이면서 수행되는 암살과 파괴 활동은 군사 활동 못지않은 위력적인 성과를 낳았다. 이런 장점 때문에 독립군의 조직과 군사 작전의 전개가 매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떠올릴 수 있는 대체 투쟁 방식이 되었다. 의열 투사들은 자신의 몸을 던져 강도 높은 의열 투쟁을 지속하면 그것이 낳을 충격과 공포로 인해 일제가 결국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품었고, 하나의 희생으로 민중 봉기를 촉발하는 선도적인 투쟁의 방법이라고 인식했다. , 일제를 향한 이들의 응징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침략의 중심부인 일제의 주요 기관이나 핵심 인물이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무차별 테러와는 차별성을 지닌 식민지 해방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의사(義士)와 열사(烈士)의 차이 – 국가보훈처
  • 의사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 열사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종로경찰서, 일본 정예 경찰들이 집결되어 있던 일제 공권력의 심장부였던 이 곳 취조실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그의 가족들이 고문으로 몸이 부서졌고 한번 끌려가면 성한 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무엇을 응징할 것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외를 망라하여 1920년대의 의열 투쟁사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선도적이었던 조직은 ‘의열단’이다.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동경 니주바시 폭탄 투척’, ‘동양 척식 주식회사 및 식산 은행 폭탄 투척’ 등은 의열단원들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주요 거사들이다. 이들의 활동 기간, 지속도, 거사의 빈도와 결과, 파장과 영향을 보면, 그 어느 면에서도 최전선에 섰다. 의열단은 적어도 1920년대 전반기 암살 파괴 운동을 상징하는 이름이었고, 나아가 일제 강점기 의열 투쟁의 대명사가 되었다. 의열단은 창단 시 일곱 부류의 암살 대상과 다섯 가지의 파괴 대상을 명확히 정하고 초지일관 투탄, 저격 거사를 실행했다. 하지만 1925년에 이르면 거사들이 거듭 실패하면서 자금까지 부족하여 사실상 활동이 종결된다.

해방 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의열단원들의 사진

의열단이 암살 파괴 운동의 대열에서 물러선 직후, 1926년 1월 상하이에서 ‘병인의용대’가 창립되어 1927년까지 의열 투쟁을 이어간다.
이들은 일본 총영사관의 밀정을 연이어 척사하고 일본 총영사관 건물 폭파 공작도 1년 사이 세 차례나 벌여 건물과 창고를 대파하기도 했다.
병인의용대는 1927년 이후가 되면 임시 정부 보위와 엄호를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일본 총영사관 폭파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했다가 후일 병인의용대를 조직한 나창헌 의사를 주범으로 지목했다.

1920년대의 의열 투쟁을 김원봉과 의열단이 대표했다면, 1930년대 의열 투쟁은 김구와 ‘한인애국단’이 주도했다. 한인애국단은 만주 사변 발발 이후 독립운동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임시 정부 국무위원들이 ‘특무대’이 설치와 암살 파괴 공작 추진을 결정하면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한인애국단은 임시 정부의 특명에 의해 임시 정부 직할로 성립한 의열 투쟁 단체였으며 그 계획과 실행은 김구 선생이 맡았다. 한인애국단이 주도한 대표적 의거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인데, 그 파급 효과는 가히 세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의거로 중국인들에게 어느 정도 쌓여 있던 반한 감정이 깨끗이 불식되고, 오히려 중국이 한국 독립 운동을 지원하게 되는 국면 대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의열 투쟁이 남긴 것

이 밖에도 상하이의 남화한인청년연맹, 베이징의 한국혁명당총동맹 등이 크고 작은 의열 투쟁을 이어 갔고, 상하이에서 건립된 ‘한국독립당’은 당책으로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내걸로 의열 투쟁을 시도했으며, ‘민족혁명당’도 ‘반동분자 및 일본 만주 요인의 암살과 절도, 관공서 파괴 공작’을 수행하도록 당원들을 밀파하는 등 의열 투쟁에 가담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일제의 사회 통제가 더욱 강화되고 파쇼적 탄압이 극렬해져서 의열 투쟁의 준비나 시도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또한 1930년대 후반기부터 국외 독립운동 진영에서 독립 전쟁 준비를 위해 군사력 확충을 위한 조직을 갖추는 데 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면서 의열 투쟁의 기운이 사그라드는 듯했다. 하지만 1945년 7월 24일, 당시 20세 안팎이던 열혈 청년들이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 일당이 친일 연설을 벌이고 있는 경성부민관의 연단을 폭파함으로써 해방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일제 강점기 최후의 의열 투쟁을 성공시켰다.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되는 과거 부민관 자리에 폭파 의거터 표석이 세워졌다.

의열 투쟁의 크고 작은 거사들은 성공보다는 실패로 끝난 경우가 더 많았다. 계획 또는 추진 단계에서 좌절되거나, 실행은 되었지만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외견상의 결과이며, 비록 실패한 거사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심리적 효과는 매우 컸다.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감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중의 반일 정서와 항일 의지가 환기되고 고취되는 효과가 있었으며, 다른 방향의 독립운동에 자극제가 되었다. 따라서 의열 투쟁은 성패를 떠나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글 김희성 / 천재교육>